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라카낭의 비극 (문단 편집) == 경기 종료 직후 반응 == >'''오로지 세 사람만이 마라카낭을 고요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. [[요한 바오로 2세|교황]][* [[1997년]] [[10월 6일]], 브라질을 공식 방문한 [[요한 바오로 2세]]가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장엄미사를 집전했다. 당시 경기장 안에서만 18만 명이, 경기장 바깥으로는 무려 150만 명의 시민들이 미사에 참석하였다.], [[프랭크 시나트라]][* [[1980년]] [[1월 26일]], 프랭크 시나트라의 첫 브라질 콘서트가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렸다. 17만 5,000명의 관중이 입장하였는데, 그 당시 단일 콘서트로는 가장 많은 관중수를 동원한 콘서트로 [[기네스북]]에 등재되었다. 이 기록은 10년 후인 [[1990년]] 5월 18일 같은 경기장에서 18만 4,000명을 동원한 [[폴 매카트니]]에 의해 깨졌다.], 그리고 [[알시데스 기지아|저]]입니다.''' >---- >[[알시데스 기지아]], 마라카낭의 비극을 회상하며 주심이 경기 종료를 선언하며 휘슬을 분 그 순간, 브라질 관중들은 그대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. 당시 [[쥘 리메]] FIFA 회장은 이를 '''"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적막감이 있었다"''' 라고 표현했고, 어느 한 브라질 관중의 목격담에 따르면 '''경기장 안에서 파리가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릴 정도'''였다고 한다. 또한 경기가 끝난 직후 2명의 관중이 심장마비, 2명의 관중이 권총 자살로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. 경기 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브라질의 우승을 예상했기에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브라질 우승 기념 메달을 22개나 만들었고[* 당시 FIFA 차원에서 주던 상에는 메달이라는 물건이 아예 없었다. 그니까 브라질 정부에서 이 메달을 준비한 것이다. '''즉, 정부 차원에서조차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던 셈이다.'''] FIFA에서도 [[포르투갈어]]로 된 우승 축사만 만들어 와서 브라질의 우승 연설만 준비하였다. 그러나 뜻밖에도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역전패하는 바람에 이 메달들은 전부 폐기되고 우루과이는 시상식 없이 쥘리메컵을 받았다. 게다가 우루과이 선수들도 분위기가 매우 험악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'''정반대로 분위기는 극도로 고요해졌다.''' 수용인원이 무려 20만명이었던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경기장 중 하나였던 마라카낭의 경기장이 괴기스러울 정도로 조용해져서는 심상찮은 위화감이 감도는 관중석 분위기가 감돌았고, 이러한 분위기에 역으로 겁을 집어먹은 우루과이 대표팀은 환호성도 세리머니도 접어두고 그냥 우승 트로피만 챙겨든 채 황급히 허둥지둥 경기장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재빠르게 우루과이로 돌아가기만 했다. 물론, 그 상황에서 우루과이 선수들이 기뻐하면서 우승 세리머니를 했다간 수십만명이 경기장에 난입해서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상황이 너무 무서워서였다. 브라질의 첫 월드컵 우승을 기념하기 위한 노래인 "Brasil os vencedores(승리의 브라질)"도 미리 만들어졌지만 결국 연주되지 못하고 그대로 묻혀버렸다. 그 외에도 브라질의 우승 기념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는 등, 미리 터뜨려 놓은 샴페인들이 한순간에 모조리 [[김칫국]]으로 변해버렸다. 경기가 끝난 마라카낭에서는 10만이 넘는 관중이 스탠드에 주저앉아 밤새도록 통곡을 하는가 하면, 울분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설레발 연설을 한 리우데자나이루 시장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등 [[폭동]]을 일으켰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